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반자이 돌격 (문단 편집) === 몰락 === 초기에는 훈련이 덜된 중국군을 상대로 나름 성공적인 결과물을 도출해냈다. [[만주사변|만주 침략]]이나 중일전쟁 초까지 기습 공격과 정신력을 강조하는 돌격 정신으로 연일 승리를 거두었다. 하지만 실상을 보면 일본은 병력 면에서 열세인 경우는 있었지만, 중국군과 비교할 때 화력이나 경제력면에서 우위였다. 당시의 중국은 전체 GDP에서는 일본을 초월할 정도로 규모상 거대했지만, 혁명과 내전으로 인한 혼란 때문에 실제 세수는 일본 제국에 비교도 하기 어려울 정도로 적었다. 국력에서 일본에 압도당할 수밖에 없었다. 즉, 일본군이 구상했던, '국력 면에서 열세에 있지만, 순전히 정신력만으로 이겨내는 승전'이라는 건 없었던 셈. 실제로 [[제2차 상하이 사변]] 당시 독일 군사고문단이 설계하고 체코와 독일제 기관총으로 보강된 중국군의 방어선을 돌파한건 보병의 착검 돌격이 아니라 수백문의 야포와 독가스탄, 그리고 항공폭탄이었다. 이후, 태평양 전쟁에서는 [[진주만 공습]], 남방작전 등에서 승기를 잡는 것처럼 보였고 순전히 운과 임전 태세가 좋았을 뿐인 초반의 승리로 자신감을 얻은 일본군 군부는 이 보병 교리에 대한 의심이나 이의를 허락하지 않게 된다. 그리고 일본은 태평양 전쟁에서 미국의 압도적인 화력과 병력수를 이겨내지 못하게 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정신력을 강조하며 정신으로 극복할 수 있다는 논리를 견지했다. 외교 관계자들은 '대체 높으신 분들의 체면 때문에 얼마나 많은 국민이 희생당해야 하는가?'라고 생각했다. 당시 미국은 일본의 진주만 공습으로 인해 일본군을 잡아 족치자는 분위기였다. 예로 '''[[윌리엄 홀시|전쟁 끝나기도 전에 일본어를 지옥에서나 쓰는 언어로 만들어버리겠다고 작심한 제독]]'''도 있었을 정도다. 최후에는 [[1억 옥쇄]]를 운운하며 식민지인과 민간인들에게까지 싸울 것을 강요하다가 [[도쿄 대공습|수도가 네이팜탄 융단폭격을 맞아 불지옥이 되고도 모자라]] [[히로시마·나가사키 원자폭탄 투하|역사상 최초로 '''핵폭탄'''을 맞은 국가]]로 전락하게 된다.[* 일본본토 대공습 문서를 통해 보면 알겠지만 일본군 방공체계는 정말 끔직하게 허술했다. 영국의 아브로 랭커스터와 미군 육군항공대에게 골고루 얻어맞던 독일군은 1945년 패전까지 무려 5만대에 달하는 연합군 항공기를 격추시켰는데 이놈의 일본군들은 레이더와 같은 신기술 도입의 거부, 고질적인 정신 우선 교리로 인한 전황 기만으로 B 29가 들이닥쳤을때 일반적으로 두들겨 맞으며 고작 300여대의 B29를 격추하는데 그쳤다] 사실, 정신력이라는 것조차도 없고 무조건 명령만 따르는 무인병기라고 해도 자체 성능이 목표를 달성하는 것에 있어서 지장이 있으면 당연히 임무수행이 불가능하다. 중일전쟁 당시 일본 육군조차도 아시아에서 가장 잘 먹고 가장 화력이 출중하며 가장 잘 싸운다는 인식이 전 세계적으로 있었고 이 말 자체는 100% 사실이다. 이미 군사력 면에서 일본이 제공권에 우위를 점하고 있고 해군력은 기껏해야 전간기에 일본에서 수입한 순양함과 그 순양함을 복제한 함선이 최신 주력함의 사실상 전부였던 빈약한 중국 해군에 비해서 일본 해군은 너무 강력한 나머지 [[워싱턴 해군 군축조약|다른 열강들이 제제를 가해서]] 더 이상 배를 건조하지 말라고 [[런던 해군 군축조약|강요하는 상황]]까지 갔었던 일본과의 비교는 애초에 무리다. 당시 태국 해군조차도 국부군과는 대조적으로 일본산 잠수함까지 몇척 보유하고 있었다. 거기다가 일본군은 전체적인 지휘가 중국보다 훨씬 수월했고, 기본적으로 [[보병]]도 전부 [[소총]], [[수류탄]]으로 무장했고 분대마다 [[기관총]]이 있었으며, 사단급부터는 차량도 굴려서 기동타격도 독립적으로 가능하고 일부 사단에는 [[장갑차]]와 [[전차]]도 있었다. 총류탄부터 박격포, 포병의 화력지원, 육/해군 항공대의 [[화력지원]]까지 가능했다. 현대에는 기초적 사항이다 보니 별 거 아닌 것 같지만 당시 아시아를 포함한 비서양국의 군대는 서양식 군대의 기본적인 틀만 갖춰도 지역강국 취급 받았다. 태국이 대표적. 식단도 총력전 이전에는 동양에 이렇게 밥을 잘줬던 군대의 전례가 없었을 정도로 호화식단이었으며, 자연히 영양 상태나 사기면에서 적국인 중국군보다 월등했다. 물론 전쟁이 진행될수록 중국군의 장교들도 어느 정도 지휘역량을 갖췄지만 일본은 물량/자질을 동시에 갖춘 전술공군과 화학무기가 있었고 이런 상황에서 사기나 전투력 측면에서 일본군 쫄병 하나와 중국군 쫄병 하나를 비교해 본다면 격차가 굉장히 컸다. 일단 든든히 먹었다. 이 링크에 들어가면 [[https://m.blog.daum.net/pzkpfw3485/2250517|난징 대학살 때 지급된 도시락을 볼 수 있는데]], 흰 쌀밥과 정어리, 채소조림, 단무지 등으로 이루어져 있다. 그리고 말, 자동차, 정찰기를 적극 이용한 정찰대를 믿고 편히 잔 일본군이었다. 반면 지난 이틀 동안 먹을 것도 없고 계속 일본군 기동대 야습을 받고 지난밤에는 포격까지 당한 중국군의 싸움은 당연히 일본군이 유리할 수밖에 없고 이런 요건이 충족되어서 반자이 돌격은 상당한 효과를 봤다. 애초에 적군이 보이기도 전에 전의가 꺾여버린 것이다. 시간이 흐르면 흐를수록 전선이 점차 확장되면서 일본군 역시 보급 문제에 시달려 급식조차 어려운 지경이 되지만, 중일전쟁 내내 일본군의 질적 우위는 분명했다. 하지만 미국과의 전쟁에서는 일본군은 개전 초기에 진주만 공습으로 인한 압도적인 해군 우위를 가지고 있었다. 일본해군보다 더 강한 미해군을 선전포고도 없는 기습선빵(진주만 공습)으로 쪼그라들게 만들고 나서 잠시 동안 일본해군이 태평양에서 호랑이 행세를 하게 된다. 공군도 역시 연합군이 아시아에 배치한 노후기체와는 비교가 안되고 연합군의 1급 전투기하고 비교해야 겨우 스펙상 동등 또는 부분적 열세였던 상황에서 일본은 확장을 통해 동아시아 거의 전체를 함락시켰다. 역시나 전술적인 우위가 확실한 상황에서의 공세였다. 하지만 미국을 분노하게 만든 대가는 역사상 소련의 분노 정도를 제외하면 사실상 견주어 볼 상대도 없을 정도로 엄청났다. 미국은 말 그대로 구축함을 찍어내기 시작했으며 순양함 전함 항공모함도 일본이 격침시키는 수보다 많이 찍어냈다. 이런 해군을 상대로 야마토급 3척 취역시키는데에도 돈이 부족해서 쩔쩔맸던 일본이 싸운다는 것조차도 말이 안된다. 중국과의 전쟁에서 판이 뒤집힌 일본은 그 사실을 인지를 못하고 계속 백병전을 선호했다. 문제는 백병전에서조차 일본군이 우위를 점하기는 무리가 있다는것. 일단 기본적인 보병 무장조차 미국은 [[M1 개런드|반자동 소총]]을 제식으로 운용하고 있었고 [[M1919 브라우닝|기관총]]이 소대마다 2대씩이나 있었다. 거기다가 미국인들은 평균적인 신장이 현재 한국군과 맞먹는 172cm인 것에 비해 일본군은 이보다 약 10cm나 작은 161cm이었다. 평균 신장이 10cm 작다는 것 자체만으로도 매우 불리한데 전쟁이 진행되면서 일본 해군이 열세에 몰리자 군수물자 보급 상황도 나락으로 떨어져 신체적 격차는 더욱 벌어졌다. 장비면에서는 그 격차가 더욱 현격한데, 일례로 기갑장비의 경우 [[M4 셔먼]]같은 중형전차는 말할 것도 없고 [[스튜어트 전차|M3 스튜어트]] '''경전차'''도 일본군 입장에서는 온갖 포들을 동원해서 겨우 잡아내는 형편이었다. 이 모든 상황을 조합하면, '''뒤떨어지는 신체 조건+수준 미달의 전투 장비+기약 없는 보급'''이 완성된다. 이런 상황에 내몰린 채 자포자기하는 심정으로 자살적인 돌격을 감행하게 되고, 결국 모두가 죽는 엔딩으로 흐르게 된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